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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신경림
장르
문인소개 시인. 대표작 《농무》등의 시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주요작품 《농무》,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등
성북과의 관계 현재 성북구 정릉동에 거주중이며 활발한 문학활동 중
첨부파일
신경림.jpg
시인 신경림 이야기
 
 
“내 삶은 그렇게 행복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만하면 사람답게 살았다는 생각을 해.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일 다 했어. 여행도 많이 하고, 글도 실컷 썼지. 
 
남은 삶도 좋은 시를 기회 있는 대로 많이 쓰고 싶어. 오로지 시만 쓰고 싶어.” 
 
- 2015년 주간경향 인터뷰 중

 
신경림(申庚林, 1936년 4월 6일~ ). 시인이자 문학인. 충청북도 충주 출생. 본관은 아주. 신경림은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43년 노은국민학교에 입학하고, 4학년 때 당숙과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 낙원의 이미지로 나오곤 하던 목계에 가게 됩니다. 그는 이때 본 목계의 풍경을 공책 한 귀퉁이에 글로 남기는데, 이것이 선생의 눈에 띄면서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신경림이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생합니다. 피난살이를 하던 그의 가족은 9·28수복 뒤 곧바로 집을 찾았다가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인민군을 피해 그의 집안에서 운영하던 광산 근처의 산 속에 숨어 며칠을 지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광산에 숨어살던 광부 셋을 헌병이 총으로 쏴 죽이는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뒤 신경림은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리며, 나중에 글을 쓰게 된다면 광산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결심으로 나온 시가 바로 폐광입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신경림은 학업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한 절씩 남한강가를 배회하는가 하면 국어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등 문제 학생이라는 딱지가 붙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국어교사이던 유촌 선생은 처벌 대신 시 다섯 편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는데, 이 과제물을 매개로 신경림은 유종호와 처음 만나게 됩니다. 유촌 선생의 아들이며 고등학교 선배인 유종호가 신경림이 낸 시를 읽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나중까지 이어져 문단에서 유종호는 시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됩니다.

 

문단 진출과 낙향
 
 

1955년 신경림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합니다. 그 사이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져 그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며 쉽지 않은 서울 생활을 합니다. 1956년 신경림은 이한직의 추천으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오게 됩니다. 이즈음 그는 금서를 읽던 친구가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는 일을 겪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한 충격과, 평소 품고 있던 문단에 대한 불신이 겹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합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신경림은 평창·영월·문경·춘천 등지를 떠돌며 광부·농부·장사꾼·인부·강사 등으로 지냅니다. 이 시기에 그는 시와 점점 멀어지면서 사회·과학 서적은 더러 봐도 문학 서적은 읽지 않으며, 소중히 간직해온 시집과 문학잡지마저 몽땅 버리기도 합니다. 

 

문단 복귀, 그러나 계속되는 불운
 

서른 즈음, 결혼할 무렵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시 쓰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충주에서 짐을 싸들고 서울 홍은동 김관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몰두합니다.

 


 

1970년 신경림은 유종호의 소개로 《창작과비평》에 시편들을 발표하는데, 농무는 이 가운데 한 작품입니다.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빼어난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은 당대 문단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신경림은 《농무》 한 권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자리매김 되고,제1회 ‘만해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농무》로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1970년대에 신경림은 거듭된 불운과 궁핍으로 몹시 가파르고 힘든 나날을 보냅니다. 어려운 시절을 군말 없이 함께 견딘 아내가 첫 시집이 나오는 것을 못 보고 눈을 감으며, 4년 뒤에는 어머니가, 또 한 해가 못 되어 병중에 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의 고단했던 삶이 나타난 시는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입니다. 그는 김관식의 집에서 나와 안양으로 내려가 조태일과 어울리며 기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교육평론》의 편집부원으로 잠시 몸을 담기도 하나 이마저 기관의 압력으로 인해 그만두었습니다. 이때 받은 퇴직금으로 길음동에 집을 구해 삶의 근거를 서울에 마련하지만 궁핍한 생활은 지속되었습니다.

 

세상과의 끊임없는 소통
 

1980년 7월, 신경림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갇혔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1984년에는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 1985년에서 1987년까지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 등 중요한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1984년 신경림은 ‘민요연구회’를 꾸려 그동안 혼자 해오던 민요 채집을 여럿이 함께 하며 문화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1985년 그는 통일을 노래한 본격 민요 시집 《달 넘세》를 내놓고 1987년에는 장시집 《남한강》, 1988년에는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를 펴냅니다. 《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신경림은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으로 눈길을 돌려, 농민 시인에서 민중시인, 노동 시인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1995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선집이 <갈리마르>에서 나와, 신경림 시의 문학성이 국제적으로 공증되는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줍니다. 신경림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아 시 창작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고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된 것도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출처

 

* 신경림 시인

 

*《문학예술》, 문학과 예술사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 2009, 나무이야기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등단 60년 신경림 “남은 삶도 시만 쓰고 싶어”, 주간경향 (2015.06.15.)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_id=201506151725051

 

*시인 신경림 이미지 - 신경림 제공

 

*문단진출과 낙향 이미지 - 문학예술

 

*문단 복귀, 그리고 계속되는 불운이미지 - 신경림 시인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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